
오페라는 전통적으로 남녀의 목소리가 어우러지는 무대 예술로 알려져 있다. 남성 테너와 여성 소프라노의 사랑 이야기, 바리톤의 복수극, 메조소프라노의 모성애 등 다양한 성역할이 극의 중심을 이룬다. 그러나 예술은 언제나 경계를 넘는 데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왔다. 최근 몇몇 오페라 작품들에서는 남성 없이, 오직 여성 성악가들만으로 구성된 공연이 시도되며 관객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이러한 구성은 단순한 실험에 그치지 않고, 여성의 목소리와 정체성, 그리고 예술적 자율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여자만 출연하는 오페라의 의미와 사례, 그리고 이들이 오페라 무대에 던지는 문화적, 예술적 메시지를 탐구하고자 한다.
1. 여성 중심 오페라의 역사와 대표작
여성만 출연하는 오페라는 비교적 현대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지지만, 그 뿌리는 의외로 깊다. 바로크 시대의 성악 공연에서는 카스트라토(거세된 남성 가수를 칭함)가 여성 역할을 맡거나 여성만으로 구성된 합창단이 존재하는 등 성별에 따른 역할 구분이 요즘과는 달랐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말하는 '여성만 등장하는 오페라'는 그 의미가 다르다. 이는 여성의 정체성, 우정, 연대, 갈등 등을 여성만의 목소리로 풀어내는 작품들로 구성된다.
대표적인 예로는 프란시스 풀랑크(Francis Poulenc)의 ‘수녀원에서의 대화(Dialogues des Carmélites)’가 있다. 이 작품은 프랑스 대혁명 시기의 카르멜 수녀들의 종교적 신념과 집단 희생의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주요 인물이 모두 여성이다. 극의 중심에 있는 블랑슈, 수녀원장 마담 드 크루아시, 마담 리도앵 등은 각기 다른 성격과 가치관을 지닌 여성으로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이 오페라는 단지 여성 배우들만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을 넘어, 여성들이 겪는 두려움, 용기, 신념 등의 정서적 복잡성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 예술적 가치가 높다.
이 외에도 현대 작곡가들 사이에서는 '페미니스트 오페라' 또는 '여성 서사 중심 오페라'라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오페라라는 고전 양식 안에서도 시대정신을 반영하고자 하는 시도로 평가받는다.
2. 여성만의 하모니: 음색과 연기의 독창성
남성과 여성의 목소리가 균형을 이루는 전통 오페라에 비해서 여성만 출연하는 오페라는 음색의 균형과 깊이를 어떻게 이뤄낼 수 있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러나 실제 무대에서 여성 성악가들만으로 구성된 공연은 놀라운 조화를 선사한다. 이는 소프라노와 메조소프라노, 콘트랄토 사이의 섬세한 음색 차이가 풍부하게 드러나면서 가능한 일이다. 필자가 이 오페라를 직접 공연 했을 때 의외로 여성들끼리의 화음이 매우 아름답다고 느꼈다.
예를 들어, ‘수녀원에서의 대화’에서는 다양한 성부의 여성 성악가들이 등장함으로써 감정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인물 간의 관계가 보다 복잡하게 그려진다. 소프라노는 공포와 희망을, 메조소프라노는 안정과 내면의 갈등을, 콘트랄토는 권위와 신념을 표현하는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구성은 단조로운 여성 목소리의 나열이 아니라 다양한 감정의 교차점을 만들어내며 오페라의 서사적 몰입감을 높인다.
또한 여성만의 무대에서는 보다 섬세한 몸짓과 정서적인 표현이 강조된다. 남성 캐릭터와의 대립, 로맨틱한 관계에서 벗어나, 여성 캐릭터들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성격을 강조하게 된다. 이는 관객에게 새로운 감정선을 전달하며 기존 오페라에서 익숙한 남녀 중심의 구도를 벗어난 색다른 예술적 경험을 하게 한다.
3. 여성 중심 오페라가 현대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
여성만이 등장하는 오페라는 단순히 성별에 기반한 무대 구성의 실험을 넘어,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젠더 감수성과 예술의 다양성을 동시에 반영하는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오페라가 단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시대적 가치와 변화를 담아내는 살아 있는 예술임을 보여주는 예시이기도 하다.
이러한 오페라들은 여성의 목소리를 단지 고음의 음역대나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이고 정치적인 존재로서의 여성을 조명한다. 수녀들의 희생을 다룬 ‘수녀원에서의 대화’는 종교적 신념과 공동체의 의미를 여성의 관점에서 조명하며, 현대의 관객들에게도 깊은 감동을 준다. 또한 이러한 공연은 여성 창작자, 연출가, 지휘자들의 참여를 확대하는 계기가 될수 있으며 예술계 전반의 성평등에 기여하는 효과를 가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나아가 이와 같은 무대는 관객에게 ‘다른 방식의 서사’를 수용하는 감수성을 길러준다. 남성 중심의 이야기 구조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여성만의 서사가 지닌 서정성과 철학적 깊이를 전달함으로써 예술 감상의 지평을 넓히는 데 기여한다.
여성만 등장하는 오페라는 단순한 형식적 실험이 아니라, 예술이 시대를 반영하고 선도하는 도구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이는 여성의 목소리를 통해 새로운 감정, 서사, 철학을 탐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오페라라는 장르의 경계를 확장하는 데 기여한다. 또한 젠더, 정체성, 공동체와 같은 현대 사회의 핵심 주제를 무대 위에서 섬세하게 풀어내며 예술의 사회적 책임을 성찰하게 만든다.
앞으로도 더 많은 여성 중심 오페라가 창작되고 무대에 올라가면서 오페라는 더욱 다양하고 풍요로운 예술로 성장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 단지 아름다운 아리아를 듣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시대 속에 담긴 목소리의 의미와 시대정신에 귀 기울여야 할 때이다.